호프는 가족입니다.
호프는 영어좀, 공부좀 시키는 학교가 아닙니다.
기실 영어도, 공부도 못시키는 학교가 수도 없이 많은데,
호프는 영어도, 공부도 시키면서 동시에 인생이라는 거목을 상대하는 어려운 과업을 수행 합니다.
이목사가 가슴으로 동영상 리플렉션을 씁니다. (꼭 숙독하며 나아가 지인들에게도 공유 해주세요)
이 동영상의 등장인물은 팔다리 없는 켄든이라는 남자아이, 켄든의 여동생 라일리, 그리고 엄마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감동시킬까요?
켄든이 팔다리 없는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모습, 엄마의 기다리고 격려하는 사랑 때문일까요?
이런 부분이 감동적을 주는 것은 틀림없지만, 진짜 감동은
팔다리 없는 오빠를 평범한 아이처럼 대하는 여동생 라일리,
팔다리 없는 아들을 평범한 아이처럼 대하는 엄마,
팔다리 없음에도 평범한 아이처럼 행동하는 켄든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문제 하나 보면 기겁하고 호들갑 떠는 모습이 아니라 그냥 '평범함'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하고 싶습니다.
교육은 호들갑 떠는데 있지 않고 평범함 속에 있다는 멧세지입니다.
만약 켄든이 내 아들이라면, 그리고 한국에서 태어 난다면 어떤 상황일까요?
엄마는 '불쌍한 내아들', 여동생은 '불쌍한 내 오빠' 하면서 켄든의 팔다리를 대신해 주며, 떠먹이고 입히며, 켄든의 팔다리 역할을 하는 지극정성의 엄마, 여동생으로 살아 가거나, 아님 특수 장애아 시설에서 맡기고 장애아로 지내게 할 겁니다.
그 결과 몸이 팔다리 없는 신체적 장애보다, 정신이 팔다리가 없는 장애아로 만들고, 평생 엄마나 여동생은 그 멍에를 지고 살고, 켄든도 장애의 한계속에서 안타까운 인생을 살겁니다.
혹 켄든 가족이 한국으로 이주해 와서 산다면 한국 사회의 시선은 이들을 장애아 라는 딱지를 씌우고 그 속에서 이들을 바라 보며 대해 줄 겁니다.
우리는 너무 문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정신적인 불구로 키워갑니다.
바쁘다고 방관하거나, 가정 형편상 아이들을 상처주거나, 부모의 생각과 경험으로 부모 중심으로 아이를 키우거나, 너무 지극정성이 되어 들쳐 업고 안고, 떠먹이며, 자기만 아는 존재로 키워나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공공질서 의식은 엉망인체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그때 짐승처럼 변한 아이로 인해 부모는 고통스러워 합니다. 행복덩어리일줄 알았는데 짐덩어리로 변하는 순간이 찾아와 버립니다.
동영상을 좀더 분석해 보겠습니다.
엄마는 켄든을 외면하거나 방치 하지 않습니다. 곁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간섭하고 다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긍정의 자극과 칭찬을 합니다. 그런데 칭찬의 내용이 한국 엄마처럼 '우리 아들은 잘 할 수 있어, 우리 아들 똑똑해, 엄마는 믿어' 라는 식의 막연 하거나 과장되고 잘못된 칭찬이 아닙니다.
지난번 동영상에서 이런 류의 칭찬이 아이를 얼마나 죽이는지 생각에 보았습니다.
켄든의 엄마는 끊임없이 칭찬과 격려를 퍼 붓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근거가 있고, 아이의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칭찬입니다.
켄든이 첫계단들을 올라갈려 애쓸때 켄든에게 '아가야 너 혼자 할수 있겠니?'라며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며 신뢰속에, 아이의 선택을 묻습니다.
켄든은 '넵 혼자 할 수 있어요'라고 확고히 답합니다. 그러자 엄마는 '넌 잘 할 수 있다'는 막연한 격려가 아니고 '넌 엄마 없이도 혼자서 잘할 수 있다'며, 엄마 도움 없이도 할 수 있다. 너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는 구체적인 격려를 합니다. 그리고 '네가 더이상 베이비가 아니고, 빅보이라고 했었다. 오늘 그 말을 증명해 내는 구나. 너 그 힘든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보니 강하구나'라며 아이의 말을 근거로 해서 칭찬을 합니다.
'넌 혼자서도 잘 하기에 어떤 도움 따윈 필요로 하지 않을 거라 본다' '엄마는 너를 지켜보고 있다'고 격려합니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는데 성공한 켄든이 엄마를 쳐다보고 행복한 미소를 짓자
'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가졌어', ' 거의 다 올라왔어, 도움필요해?' 켄든이 '아니요. 도움따윈 필요 없어요'합니다.
미끄럼틀에 올라서자, '엄마가 너를 받아 줄거다, 자신있게 미끄럼틀을 타라'합니다.
켄든의 여동생 라일라를 봅시다.
라일라는 팔다리 없는 오빠 켄든을 전혀 돕지 않습니다. 그저 평범한 오빠로 보는 겁니다. 아이를 평범하게 보는 엄마처럼 그렇게 대합니다. 그런데 오빠가 계단을 오르는 속도가 느리다고 오빠를 짜증내거나, 불쌍히 여기며 들어서 올려주지 않고, 그렇다고 오빠를 방해하지도 않고, 자기 스스로 미끄럼틀을 탑니다. 켄든이 처음 계단들에 있을때 엄마는 라일라에게 오빠를 조심하여 추월하라 말합니다. 중간 이상 계단에 있을때 엄마는 라일라에게 오빠를 추월하지 말고 자기 순서를 지키라 말합니다. 라일라는 전혀 투정하거나, 징징대지 않고 기다립니다. 오빠가 마지막 계단까지 올라가자 그때서야 오빠를 추월합니다. 엄마의 말은 오빠가 미끄럼틀 탈때까지 기다리라 하는 말이였기에, 라일라에게 단호히 지적합니다.
"오빠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고 추월하다니 인내심이 없어 유감이다". 오빠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기다리라는 것으로 해석 할 수도 있었기에 무죄?입니다.
암튼 이런 질서의식까지 그 어린 동생 라일라는 실천하고 있습니다. 물론 엄마는 라일라에게도 칭찬과 격려를 놓치지 않습니다. 첫번째 미끄럼을 타고 내려 올때 '야 라일라가 내려오는 구나! 우리 라일라는 빅 걸처럼 혼자서도 미끄럼을 잘 타고 내려왔구나'라며 긍정의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엄마를 필요로 합니다.
이 엄마가 동영상 찍을 때만 이런 립서비스 보여주기 코멘트가 아님이, 라일라의 오빠에 대한 태도에서, 그리고 라일라의 질서 의식에서, 그리고 라일라의 혼자 스스로 하기를 통해 증명됩니다. 그리고 켄든의 자신감, 미소, 혼자해내는 모습에서 또한번 증명됩니다. 엄마의 기다림과 여유가 진정어린 말투에서 느껴집니다.
이런 엄마 밑에 위대한 아이가 자랍니다.
우리는 왜 안되는 것일까요? 나는 왜 안되는 것일까요?
간혹 호프 행사때 오는 호프 가족 어린이들의 질서없는 행동과 부모들의 지극함?이 안타깝고, 호프에서 매일 매일 씨름주는 아이들을 보며 안타까울 때,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도 저런 엄마를 주시옵소서!
추신: 이 엄마는 미국 텍사스주 달라스 시의 덴턴이라는 (이목사가 달라스 가면 머무는 지인의 집 지역)곳에 삽니다. 가능하면 내년 총회때 강사로 모실 생각입니다.
켄든은 도와 달라고 징징 보채고 어리광하고, 엄마에게 의존하지않습니다. 오히려 엄마의 도움을 거부하고 스스로 할려하고, 엄마는 그것을 절제하며 신뢰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호프 부모님들도 주일 마다 전화 넘어로 들려오는 아이가 몸이 떨어져 있다고 안타까운 마음에, 철없는 의존적 아이의 어리광 받아주고, 장단 맞추는 식이 되기 보다 아이를 홀로 세우는 켄든의 엄마가 되기를 원합니다.
조선미 심리학자는 너무 친절한 부모가 좋을까? 절대로 아니다.왜냐면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는 자기 한계를 모르고 힘든것을 못견딘다. 엄마가 너무 친절하면 세상사람들도 엄마 같기를 바란다. 적당히 친절한 부모의 아이가 세상의 부당함도 잘 견딘다. 엄마가 너무 열심히 함께 놀아주는 것도 별로 좋지 않다. 적당히 심심하고, 적당히 뒹굴고, 투정부리며 크도록 해야 한다. 그런 아이는 유치원도 가기 싫어한다. 왜 유치원이 그리고 유치원 학생들이 엄마처럼 절대 친절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세상은 그아이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으니까.
아이는 결국 부모에 의해 결정되기에 아이가 바뀔려면 결국 부모가 바뀌어야 한다.
호프의 교육은 학교 아이 부모라는 삼박자속에서 가장 잘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이목사의 긴 리플렉션이 우리부모가 바뀌는데 기여되기를 소원합니다.
모두를 축복합니다.
호프는 가족입니다.
호프는 영어좀, 공부좀 시키는 학교가 아닙니다.
기실 영어도, 공부도 못시키는 학교가 수도 없이 많은데,
호프는 영어도, 공부도 시키면서 동시에 인생이라는 거목을 상대하는 어려운 과업을 수행 합니다.
이목사가 가슴으로 동영상 리플렉션을 씁니다. (꼭 숙독하며 나아가 지인들에게도 공유 해주세요)
이 동영상의 등장인물은 팔다리 없는 켄든이라는 남자아이, 켄든의 여동생 라일리, 그리고 엄마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감동시킬까요?
켄든이 팔다리 없는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모습, 엄마의 기다리고 격려하는 사랑 때문일까요?
이런 부분이 감동적을 주는 것은 틀림없지만, 진짜 감동은
팔다리 없는 오빠를 평범한 아이처럼 대하는 여동생 라일리,
팔다리 없는 아들을 평범한 아이처럼 대하는 엄마,
팔다리 없음에도 평범한 아이처럼 행동하는 켄든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문제 하나 보면 기겁하고 호들갑 떠는 모습이 아니라 그냥 '평범함'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하고 싶습니다.
교육은 호들갑 떠는데 있지 않고 평범함 속에 있다는 멧세지입니다.
만약 켄든이 내 아들이라면, 그리고 한국에서 태어 난다면 어떤 상황일까요?
엄마는 '불쌍한 내아들', 여동생은 '불쌍한 내 오빠' 하면서 켄든의 팔다리를 대신해 주며, 떠먹이고 입히며, 켄든의 팔다리 역할을 하는 지극정성의 엄마, 여동생으로 살아 가거나, 아님 특수 장애아 시설에서 맡기고 장애아로 지내게 할 겁니다.
그 결과 몸이 팔다리 없는 신체적 장애보다, 정신이 팔다리가 없는 장애아로 만들고, 평생 엄마나 여동생은 그 멍에를 지고 살고, 켄든도 장애의 한계속에서 안타까운 인생을 살겁니다.
혹 켄든 가족이 한국으로 이주해 와서 산다면 한국 사회의 시선은 이들을 장애아 라는 딱지를 씌우고 그 속에서 이들을 바라 보며 대해 줄 겁니다.
우리는 너무 문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정신적인 불구로 키워갑니다.
바쁘다고 방관하거나, 가정 형편상 아이들을 상처주거나, 부모의 생각과 경험으로 부모 중심으로 아이를 키우거나, 너무 지극정성이 되어 들쳐 업고 안고, 떠먹이며, 자기만 아는 존재로 키워나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공공질서 의식은 엉망인체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그때 짐승처럼 변한 아이로 인해 부모는 고통스러워 합니다. 행복덩어리일줄 알았는데 짐덩어리로 변하는 순간이 찾아와 버립니다.
동영상을 좀더 분석해 보겠습니다.
엄마는 켄든을 외면하거나 방치 하지 않습니다. 곁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간섭하고 다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긍정의 자극과 칭찬을 합니다. 그런데 칭찬의 내용이 한국 엄마처럼 '우리 아들은 잘 할 수 있어, 우리 아들 똑똑해, 엄마는 믿어' 라는 식의 막연 하거나 과장되고 잘못된 칭찬이 아닙니다.
지난번 동영상에서 이런 류의 칭찬이 아이를 얼마나 죽이는지 생각에 보았습니다.
켄든의 엄마는 끊임없이 칭찬과 격려를 퍼 붓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근거가 있고, 아이의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칭찬입니다.
켄든이 첫계단들을 올라갈려 애쓸때 켄든에게 '아가야 너 혼자 할수 있겠니?'라며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며 신뢰속에, 아이의 선택을 묻습니다.
켄든은 '넵 혼자 할 수 있어요'라고 확고히 답합니다. 그러자 엄마는 '넌 잘 할 수 있다'는 막연한 격려가 아니고 '넌 엄마 없이도 혼자서 잘할 수 있다'며, 엄마 도움 없이도 할 수 있다. 너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는 구체적인 격려를 합니다. 그리고 '네가 더이상 베이비가 아니고, 빅보이라고 했었다. 오늘 그 말을 증명해 내는 구나. 너 그 힘든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보니 강하구나'라며 아이의 말을 근거로 해서 칭찬을 합니다.
'넌 혼자서도 잘 하기에 어떤 도움 따윈 필요로 하지 않을 거라 본다' '엄마는 너를 지켜보고 있다'고 격려합니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는데 성공한 켄든이 엄마를 쳐다보고 행복한 미소를 짓자
'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가졌어', ' 거의 다 올라왔어, 도움필요해?' 켄든이 '아니요. 도움따윈 필요 없어요'합니다.
미끄럼틀에 올라서자, '엄마가 너를 받아 줄거다, 자신있게 미끄럼틀을 타라'합니다.
켄든의 여동생 라일라를 봅시다.
라일라는 팔다리 없는 오빠 켄든을 전혀 돕지 않습니다. 그저 평범한 오빠로 보는 겁니다. 아이를 평범하게 보는 엄마처럼 그렇게 대합니다. 그런데 오빠가 계단을 오르는 속도가 느리다고 오빠를 짜증내거나, 불쌍히 여기며 들어서 올려주지 않고, 그렇다고 오빠를 방해하지도 않고, 자기 스스로 미끄럼틀을 탑니다. 켄든이 처음 계단들에 있을때 엄마는 라일라에게 오빠를 조심하여 추월하라 말합니다. 중간 이상 계단에 있을때 엄마는 라일라에게 오빠를 추월하지 말고 자기 순서를 지키라 말합니다. 라일라는 전혀 투정하거나, 징징대지 않고 기다립니다. 오빠가 마지막 계단까지 올라가자 그때서야 오빠를 추월합니다. 엄마의 말은 오빠가 미끄럼틀 탈때까지 기다리라 하는 말이였기에, 라일라에게 단호히 지적합니다.
"오빠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고 추월하다니 인내심이 없어 유감이다". 오빠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기다리라는 것으로 해석 할 수도 있었기에 무죄?입니다.
암튼 이런 질서의식까지 그 어린 동생 라일라는 실천하고 있습니다. 물론 엄마는 라일라에게도 칭찬과 격려를 놓치지 않습니다. 첫번째 미끄럼을 타고 내려 올때 '야 라일라가 내려오는 구나! 우리 라일라는 빅 걸처럼 혼자서도 미끄럼을 잘 타고 내려왔구나'라며 긍정의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엄마를 필요로 합니다.
이 엄마가 동영상 찍을 때만 이런 립서비스 보여주기 코멘트가 아님이, 라일라의 오빠에 대한 태도에서, 그리고 라일라의 질서 의식에서, 그리고 라일라의 혼자 스스로 하기를 통해 증명됩니다. 그리고 켄든의 자신감, 미소, 혼자해내는 모습에서 또한번 증명됩니다. 엄마의 기다림과 여유가 진정어린 말투에서 느껴집니다.
이런 엄마 밑에 위대한 아이가 자랍니다.
우리는 왜 안되는 것일까요? 나는 왜 안되는 것일까요?
간혹 호프 행사때 오는 호프 가족 어린이들의 질서없는 행동과 부모들의 지극함?이 안타깝고, 호프에서 매일 매일 씨름주는 아이들을 보며 안타까울 때,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도 저런 엄마를 주시옵소서!
추신: 이 엄마는 미국 텍사스주 달라스 시의 덴턴이라는 (이목사가 달라스 가면 머무는 지인의 집 지역)곳에 삽니다. 가능하면 내년 총회때 강사로 모실 생각입니다.
켄든은 도와 달라고 징징 보채고 어리광하고, 엄마에게 의존하지않습니다. 오히려 엄마의 도움을 거부하고 스스로 할려하고, 엄마는 그것을 절제하며 신뢰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호프 부모님들도 주일 마다 전화 넘어로 들려오는 아이가 몸이 떨어져 있다고 안타까운 마음에, 철없는 의존적 아이의 어리광 받아주고, 장단 맞추는 식이 되기 보다 아이를 홀로 세우는 켄든의 엄마가 되기를 원합니다.
조선미 심리학자는 너무 친절한 부모가 좋을까? 절대로 아니다.왜냐면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는 자기 한계를 모르고 힘든것을 못견딘다. 엄마가 너무 친절하면 세상사람들도 엄마 같기를 바란다. 적당히 친절한 부모의 아이가 세상의 부당함도 잘 견딘다. 엄마가 너무 열심히 함께 놀아주는 것도 별로 좋지 않다. 적당히 심심하고, 적당히 뒹굴고, 투정부리며 크도록 해야 한다. 그런 아이는 유치원도 가기 싫어한다. 왜 유치원이 그리고 유치원 학생들이 엄마처럼 절대 친절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세상은 그아이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으니까.
아이는 결국 부모에 의해 결정되기에 아이가 바뀔려면 결국 부모가 바뀌어야 한다.
호프의 교육은 학교 아이 부모라는 삼박자속에서 가장 잘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이목사의 긴 리플렉션이 우리부모가 바뀌는데 기여되기를 소원합니다.
모두를 축복합니다.